[열린광장] 잊히지 않는 LA 폭동
4월이 저물었다. 엘리엇의 시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4월은 나에게도 잔인한 달이다. 폭동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어느새 33년 전의 일이 됐다. 잊힐만한 세월인데 잊히지 않는다. 1992년 4월29일, 폭동은 흑인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들을 석방한 것에 대한 항의로 시작됐다. 그 무렵 두순자 사건의 판결을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며 LA 코리아타운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4.29는 우리 식구가 LA에 정착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일어났다. 남편은 은행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은행 면접을 마친 상태였다. 출근을 앞두고 일어난 폭동으로 나는 예정보다 일주일 늦게 일터로 나갔다. 그 사이 주방위군이 출동했고 5월4일이 되어서야 폭동은 끝났다.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 은행에 출근했다. 폭동으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만났다. 피해자들의 실상은 다양했다. 화마로 전소된 가게를 보며 실의에 빠진 분들이 많았다. 물건은 약탈당했어도 가게는 그대로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더니 그런 것만도 아니란다. 장사가 안 되던 차에 가게가 전소돼 보상금을 받게 돼 오히려 잘됐다는 분도 있었다. 세금을 잘 낸 분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보조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어 또 다른 희망을 내보이기도 했다. 폭동이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돈벌이만 열중하던 한인들은 정치력이 약함을 깨닫고 한인 정치인을 세우기에 한마음이 됐다. 가난한 흑인과 히스패닉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인들이 그들과 친구로 지내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들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현지 타인종과 교류를 활발히 해가며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은행을 퇴직하고 지금은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25년이 훌쩍 넘었다. 베트남 사람과 히스패닉이 대다수인 지역이다. 그동안 험한 일을 셀 수 없이 겪었다. 도둑이 가게에 들어와 물질적 손실을 낼 때마다 4,29를 생각하곤 했다. 개인적인 4.29를 수없이 겪었다. 눈앞에서 물건 들고 뛰는 도둑을 여러 번 마주했다. 나도 어느 순간 두순자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손님과 도둑을 구별할 수 없으니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말은 예의 갖춰 하나, 가슴 한구석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게 먹고 사느라 바쁜 이민자일 터. 타인종 손님을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주위에서 흔히 만나는 히스패닉은 우리 자녀의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됐다. 그들과 결혼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타인종 이민자들은 우리 아이들의 급우며 직장 동료며, 우리 며느리, 사위가 됐다.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 해당하겠지만 양심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남의 것을 훔쳐 살아가는, 옳고 그름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들. 그들의 가슴이 말랑말랑 해지길 바란다. 4월이 지나갔다. 오늘도 손님을 미소로 맞는다. 잊히지 않는 그날을 생각하면서. 김현실 / 수필가열린광장 폭동 la 폭동 타인종 이민자들 히스패닉 지역